한 시간을 기다려 들어간 진료실. 의사 선생님이 검사 결과지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'이상 없네요' 하고는, 정작 제 얘긴 묻지도 않은 채 끝났습니다. 이런 진료, 받아보신 적 있으신가요?
이 장면에서 오래 머문 눈길은 사람이 아니라 결과지 위에 있었습니다. 종이에 찍힌 수치는 빠짐없이 읽혔고, 다만 그 수치가 미처 담지 못한 것—언제부터 이랬는지, 요즘 잠은 어떤지—을 꺼낼 자리는 그 짧은 시간 안에 열리지 않았습니다.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사람을 대하는 두 방식을 '나-너'와 '나-그것'으로 나눴습니다. 앞의 상대를 마주 앉은 한 사람으로 대하느냐, 읽고 확인하면 끝나는 하나의 대상으로 대하느냐의 차이입니다. 결과지는 '그것'입니다. 그런데 그 종이가 끝내 담지 못하는 한 줄, '오늘 여기 앉은 사람이 무엇을 묻고 싶은가'는 오직 마주 앉아 고개를 들 때에만 열립니다. 이 진료에서 비어 있던 건 시간이 아니라, 결과지 너머의 사람을 향해 눈을 드는 그 한 번의 마주봄이었습니다.
결과지가 틀린 건 아닙니다. 다만 어떤 자리에서는 앞에 놓인 종이가 사람보다 먼저 읽히고, 그 사람이 무엇을 묻고 싶었는지는 끝내 종이 밖에 남습니다. 종이는 몇 초면 다 읽히지만, 그 위로 눈을 드는 한 번은 그 몇 초 안에 좀처럼 들어오지 못합니다. 오늘 마주 앉았던 얼굴 앞에서 끝내 종이 밖에 남겨진 한 줄은 없었는지, 그 비어 있던 자리를 조용히 짚어 보게 됩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