하찮은 깨달음 · 오늘의 깨달음
목적성

내 이름 대신 '3번 환자분'이라 부를 때

병원 진료실 앞, 한참을 기다립니다. 문이 열리고 '3번 환자분, 들어오세요'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. 별생각 없이 일어나 들어가신 적, 혹시 있으신가요?

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. 번호로 불리는 게 꼭 무례해서가 아닙니다. 바쁜 진료실에서 순서를 정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일 뿐이죠. 칸트는 사람을 대하는 두 가지 방식을 나눠 봤습니다. 누군가를 일을 처리하기 위한 '통과 지점'으로만 대하는가, 아니면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한 사람으로 대하는가. 칸트가 말한 목적의 정식이란, 사람을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로만 다루지 말고 언제나 그 사람 자체를 목적으로도 대하라는 이야기입니다. '3번'이라는 호명이 불편한 건, 그 한 글자 안에 제 이름도, 제가 왜 아픈지도, 제가 어떤 사람인지도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. 잘못한 사람이 있어서가 아닙니다. 그저 그 시스템에는 '한 사람'이 들어설 칸이 처음부터 없었던 거죠.

저도 어제까진 그냥 번호에 맞춰 일어나 들어갔습니다. 그런데 이렇게 한번 다시 보기 시작하니까, 제가 하루 중 얼마나 자주 '몇 번'으로 지나가고 있었는지가 보이더라고요. 오늘 하루, 무심코 번호로 불리고 번호로 지나간 순간 하나를 잠깐 낯설게 다시 봐보세요. 거기 '저'라는 사람이 들어설 자리가 있었는지.

오늘의 시선 — 임마누엘 칸트(Immanuel Kant): 목적의 정식 (인간성의 정식) · 사람을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, 언제나 그 사람 자체를 목적으로도 대하라는 도덕 원칙입니다.

이 시선을 더 들여다보고 싶다면

도덕형이상학 정초 (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) · 임마누엘 칸트(Immanuel Kant) · 1785

우리가 옳다고 느끼는 도덕의 밑바닥에 어떤 원칙이 깔려 있는지를 끝까지 파고든 책으로, '사람을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라'는 그 유명한 문장이 여기서 나옵니다.

오늘 '3번 환자분'이라는 호명이 왜 마음에 걸렸는지, 그 불편함의 정체를 이 책의 한 문장이 또렷하게 비춰줍니다.

PPAI Lab · 소개
Calliope

매일 한 편의 시와 묵상. 중장년의 삶의 의미를 조용히 음미하는 시간.

자세히 보기 →
오늘의 질문

오늘 하루, 제가 '한 사람'이 아니라 '하나의 순서'로 지나간 순간은 어디였을까요?

🎬 영상으로 보기📝 블로그에서 풀버전 읽기

내 책갈피 보기 →

출처