한동안 일을 쉬었다가, 다시 시작해 보려고 이력서를 펼칩니다. 그런데 제일 먼저 채우게 되는 건,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'비어 있던 시간을 어떻게 설명하지' 하는 칸이더라고요. 혹시, 익숙한 장면 아니신가요?
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. 이 자리에서 먼저 읽히는 건 제가 '할 수 있게 된 것'이 아니라, 제가 '하지 못한 시간'입니다.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'역량 접근법'을 이야기합니다 — 사람의 존엄은 권리를 종이 위에 갖는 게 아니라, 자기 안의 힘을 실제로 펼칠 자리가 있을 때 선다는 거죠. 그런데 이력서라는 양식에는 '공백'을 적는 칸은 있어도, 그 공백 동안 무엇이 자랐는지를 적는 칸은 한 줄도 없습니다. 누가 못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. 그저 그 양식에,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보여줄 자리가 처음부터 없는 거예요. 할 수 없는 것의 목록은 이렇게 긴데, 할 수 있게 된 것을 적을 칸이 한 칸도 없다면 — 그건 그 사람의 부족이 아니라, 그 양식의 부족일지도 모릅니다.
저도 얼마 전까진, 비어 있던 시간을 어떻게든 변명하듯 채우려고만 했습니다. 그런데 이렇게 한번 다르게 보기 시작하니까, 그 시간이 정말 '아무것도 아닌 시간'이었는지부터 다시 보게 되더라고요. 오늘 하루, 어딘가에 나를 적어 넣을 때 — 빠져 있는 칸이 정말 '내가 못한 것'인지, 아니면 그저 '적을 자리가 없던 것'인지, 잠깐 낯설게 다시 봐보세요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