밤늦게까지 붙잡고 만든 기획서가 윗선에 올라갔습니다. 그런데 보고 표지에 적힌 이름은 제 이름이 아니라, 부장님 이름이었습니다. 혹시, 익숙한 장면 아니신가요?
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.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, 사람이 사람으로 선다는 건 자기가 한 일이 '아, 저 사람이 했구나' 하고 다시 자기에게 돌아올 때라고 말합니다. 이걸 어려운 말로 인정(Anerkennung)이라고 부르는데, 사실은 그냥 '한 번 제대로 불려지는 일'입니다. 그 장면에서 진짜 문제는 부장님이 나쁜 사람이라는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. 보고가 올라가는 그 길 위에, 처음부터 '누가 만들었나'를 적을 칸이 없었던 거죠. 표지에는 '누가 보고하는가'를 적는 자리만 있고, '누가 만들었는가'를 적는 자리는 없습니다. 한 사람의 일이 분명히 거기 있었는데, 그 일을 한 사람이 머물 칸은 그 시스템 어디에도 열려 있지 않았던 겁니다.
저도 어제까진 그냥 '원래 다 그런 거지' 하고 넘겼습니다. 그런데 이렇게 한번 다시 보기 시작하니까, 안 보이던 게 보이더라고요. 오늘 하루, 누군가의 일이 슬그머니 다른 이름으로 흘러가는 장면이 있다면, 거기 빠져 있는 칸 하나를 잠깐 낯설게 다시 봐보세요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