하찮은 깨달음 · 오늘의 깨달음
목적성

서류에 딸려 온 그 메모는, 제 얘기였지만 제게 하는 말은 아니었습니다.

민원 서류든 진료 안내문이든, 무언가를 받아 들었는데 아래쪽에 지우다 만 메모 한 줄이 남아 있습니다. 저에게 하는 안내가 아니라, 담당자들끼리 저를 두고 적어 둔 짧은 메모요. 무심코 그 한 줄을 읽어 보신 적, 있으신가요?

지우려다 만 그 한 줄은, 정작 받는 사람이 아니라 그 곁의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. 받는 사람에게 건네는 안내가 아니라, 옆자리 동료가 읽고 일을 넘기도록 한 사람을 '어떤 건'으로 줄여 적어 둔 메모니까요. 부버는 사람을 마주하는 방식을 '나-너'와 '나-그것'이라 불렀습니다. '너'는 눈을 맞추고 말을 건네는 자리이고, '그것'은 처리하고 분류해 넘겨두는 자리입니다. 그 메모가 아무렇지 않게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건, 이 사람이 언젠가 그걸 읽을 '너'라고는 처음부터 상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. 그러니까 그 종이 위에는, 이 사람과 눈을 맞출 자리 하나가 애초에 비어 있었던 셈입니다.

우리도 하루에 몇 번쯤은, 누군가를 두고 '처리할 일'로 적거나 말합니다. 그 사람이 언젠가 그 말을 마주하게 될 거라고는 미처 셈하지 않은 채로요. 오늘 오간 안내와 응대 가운데, 마주 볼 자리 하나가 비어 있진 않았는지. 그 빈자리에 눈길이 한 번 머무는 것만으로도, 누군가에 '대해' 하던 말은 그 사람에게 '건네는' 말 쪽으로 반 발쯤 돌아섭니다.

오늘의 시선 — 마르틴 부버(Martin Buber): '나-너'와 '나-그것' — 사람을 도구(그것)로만 대하는 순간 참된 관계가 사라진다 · 사람을 눈 맞추고 말을 건네는 '너'로 대하느냐, 처리하고 분류하는 '그것'으로 다루느냐에 따라 그 자리에 관계가 열리기도, 닫히기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.

이 시선을 더 들여다보고 싶다면

나와 너 (Ich und Du) · 마르틴 부버 · 1923

사람을 대하는 방식엔 두 가지가 있어서, 상대를 '너'로 마주할 때에야 참된 만남이 열리고, '그것'으로 다룰 땐 상대가 하나의 대상으로 굳어 버린다고 말하는 책입니다.

메모 속 '처리할 대상'으로 적힌 한 사람을 다시 볼 때, 이 책의 '너'와 '그것'만큼 그 한 줄을 새로 비춰 보게 하는 렌즈도 드뭅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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쌤 (SSEM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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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늘의 질문

오늘 내가 누군가에 '대해' 남긴 말은, 그 사람에게 '건넬' 수도 있는 말이었을까요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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