회의 시작 전, 제가 툭 꺼낸 아이디어가 하나 있었습니다. 그런데 회의가 시작되자, 윗사람이 그걸 자기 생각인 것처럼 보고하더라고요. 좋은 아이디어라는 칭찬도, 그 자리에서 그분이 받았습니다.
이 장면에서 아이디어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. 회의에서 멀쩡히 쓰였고, 좋은 평가까지 받았으니까요. 다만 그 아이디어가 '누구에게서 나왔는가'를 되짚는 자리에서, 처음 그 말을 꺼낸 사람은 조용히 빠져 있습니다. 찰스 테일러는 사람이 '나'로 서는 일을, 내가 한 것이 남을 거쳐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그 주고받음 속에서 봤습니다 — 정체성은 홀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, 누군가 나를 알아봐 줄 때 비로소 모양을 갖춘다는 것이죠. 그렇게 보면 이 회의실에 비어 있던 건 아이디어가 아니라, 그것을 '누가 처음 냈는지' 되돌려 놓을 자리였습니다. 일이 매끄럽게 굴러갈수록, 그 출처를 적어 둘 칸은 오히려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.
오늘 잘 굴러간 어떤 일을 떠올려 보면, 그 일이 시작된 첫 자리는 의외로 잘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. 누구의 공을 따지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. 다만 매끄럽게 지나간 그 일 어딘가에, 처음 그 말을 꺼낸 사람의 이름이 들어설 자리가 비어 있진 않았는지. 그 빈자리 하나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, 오늘은 충분합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