하찮은 깨달음 · 오늘의 깨달음
역량

이력서엔 '비어 있던 시간'을 적는 칸은 있는데, 그동안 자란 건 어디에 적나요?

한동안 일을 쉬었다가, 다시 시작해 보려고 이력서를 펼칩니다. 그런데 제일 먼저 채우게 되는 건,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'비어 있던 시간을 어떻게 설명하지' 하는 칸이더라고요. 혹시, 익숙한 장면 아니신가요?

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. 이 자리에서 먼저 읽히는 건 제가 '할 수 있게 된 것'이 아니라, 제가 '하지 못한 시간'입니다.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'역량 접근법'을 이야기합니다 — 사람의 존엄은 권리를 종이 위에 갖는 게 아니라, 자기 안의 힘을 실제로 펼칠 자리가 있을 때 선다는 거죠. 그런데 이력서라는 양식에는 '공백'을 적는 칸은 있어도, 그 공백 동안 무엇이 자랐는지를 적는 칸은 한 줄도 없습니다. 누가 못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. 그저 그 양식에,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보여줄 자리가 처음부터 없는 거예요. 할 수 없는 것의 목록은 이렇게 긴데, 할 수 있게 된 것을 적을 칸이 한 칸도 없다면 — 그건 그 사람의 부족이 아니라, 그 양식의 부족일지도 모릅니다.

저도 얼마 전까진, 비어 있던 시간을 어떻게든 변명하듯 채우려고만 했습니다. 그런데 이렇게 한번 다르게 보기 시작하니까, 그 시간이 정말 '아무것도 아닌 시간'이었는지부터 다시 보게 되더라고요. 오늘 하루, 어딘가에 나를 적어 넣을 때 — 빠져 있는 칸이 정말 '내가 못한 것'인지, 아니면 그저 '적을 자리가 없던 것'인지, 잠깐 낯설게 다시 봐보세요.

오늘의 시선 — 마사 누스바움(Martha Nussbaum): 역량 접근법(Capabilities Approach) · 존엄은 권리를 종이 위에 갖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, 자기 안의 역량을 실제로 펼칠 현실의 자리가 있을 때 선다는 시선입니다.

이 시선을 더 들여다보고 싶다면

역량의 창조 (Creating Capabilities) · 마사 누스바움(Martha Nussbaum) · 2011

한 사회가 잘 사는지는 GDP 같은 숫자가 아니라, 그 안의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로 봐야 한다고 말하는 책입니다.

'기회가 열려 있다'는 말과 '실제로 펼칠 수 있다'는 건 다르다는 것 — 오늘 장면 속 그 거리를 더 들여다보고 싶다면 펼쳐볼 만합니다.

PPAI Lab · 소개
Calliope

매일 한 편의 시와 묵상. 중장년의 삶의 의미를 조용히 음미하는 시간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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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늘의 질문

오늘 내가 채운 어떤 칸 옆에는, 정작 '내가 할 수 있게 된 것'을 적을 자리가 빠져 있지 않았나요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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