하찮은 깨달음 · 오늘의 깨달음
인정

그 기획서에 제 이름이 없던 건, 원래 그런 칸이 없어서였을까요?

밤늦게까지 붙잡고 만든 기획서가 윗선에 올라갔습니다. 그런데 보고 표지에 적힌 이름은 제 이름이 아니라, 부장님 이름이었습니다. 혹시, 익숙한 장면 아니신가요?

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.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, 사람이 사람으로 선다는 건 자기가 한 일이 '아, 저 사람이 했구나' 하고 다시 자기에게 돌아올 때라고 말합니다. 이걸 어려운 말로 인정(Anerkennung)이라고 부르는데, 사실은 그냥 '한 번 제대로 불려지는 일'입니다. 그 장면에서 진짜 문제는 부장님이 나쁜 사람이라는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. 보고가 올라가는 그 길 위에, 처음부터 '누가 만들었나'를 적을 칸이 없었던 거죠. 표지에는 '누가 보고하는가'를 적는 자리만 있고, '누가 만들었는가'를 적는 자리는 없습니다. 한 사람의 일이 분명히 거기 있었는데, 그 일을 한 사람이 머물 칸은 그 시스템 어디에도 열려 있지 않았던 겁니다.

저도 어제까진 그냥 '원래 다 그런 거지' 하고 넘겼습니다. 그런데 이렇게 한번 다시 보기 시작하니까, 안 보이던 게 보이더라고요. 오늘 하루, 누군가의 일이 슬그머니 다른 이름으로 흘러가는 장면이 있다면, 거기 빠져 있는 칸 하나를 잠깐 낯설게 다시 봐보세요.

오늘의 시선 — 악셀 호네트(Axel Honneth): 인정(Anerkennung)의 부재 · 사람은 자기가 한 일이 '저 사람이 했구나' 하고 되돌아와 불릴 때 비로소 한 사람으로 선다는 생각입니다.

이 시선을 더 들여다보고 싶다면

인정투쟁 (Kampf um Anerkennung) · 악셀 호네트 · 1992

사람은 사랑·권리·연대라는 세 가지 인정을 받을 때 비로소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고, 그 인정이 어긋날 때 사람들은 그것을 되찾으려 싸운다고 말하는 책입니다.

내가 한 일이 '내가 한 일'로 돌아오지 못한 오늘의 장면을, 인정이라는 시선으로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다면 이 책이 그 출발점입니다.

PPAI Lab · 소개
Calypso

매일 아침 한 편, 4분의 뒷이야기. 도움은 안 되지만 그냥 읽어보면 재밌는 거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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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늘의 질문

오늘 제가 한 일 중에, '제가 했다'고 끝내 불리지 못하고 그냥 흘러간 것은 없었을까요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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