하찮은 깨달음 · 오늘의 깨달음
비모욕

엘리베이터에 붙은 미납 명단 — 벽에 걸린 게, 정말 숫자뿐이었을까요?

엘리베이터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습니다. '관리비 미납 세대'라는 제목 아래로, 호수들이 줄줄이 적혀 있고요. 그 명단에서 익숙한 번호를 본 적, 혹시 있으신가요?

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. 관리비를 걷는 일은 당연하고, 그 명단을 붙인 분도 그저 맡은 일을 했을 뿐입니다. 누구도 모욕을 주려던 건 아니에요. 그런데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. 형편이 서로 다른 사회에서, 우리는 어떻게 상대의 자존을 깎지 않으면서 함께 살 수 있을까. 그는 그걸 '존중'이라고 불렀는데요, 돈이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어려운 처지의 사람도 사람으로 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. 이 장면에서 빠진 게 바로 그 자리예요. 그 종이엔 '납부'와 '미납'을 적는 칸은 있어도, '이 집이 지금 좀 어렵구나' 하고 조용히 물어볼 칸은 없습니다. 사정을 따로 전할 통로가 있었다면 같은 일도 명단이 아니라 한 통의 안내였을 텐데, 시스템이 효율만 남기고 체면을 둘 자리를 지우면 곤란은 그렇게 벽에 걸립니다.

저도 예전엔 그런 명단을 보면 그냥 '누가 또 밀렸나 보다' 하고 지나쳤습니다. 그런데 이렇게 한번 다시 보기 시작하니까, 그 종이 한 장이 누군가에겐 매일 오르내려야 하는 벽이었겠구나 싶더라고요. 오늘 하루, 효율을 위해 누군가의 사정이 그냥 벽에 걸려 버린 장면은 없었는지, 잠깐 낯설게 다시 봐보셔도 좋겠습니다.

오늘의 시선 — 리처드 세넷(Richard Sennett): 존중 — 형편이 서로 다른 사회에서도 사람을 깎아내리지 않는 법 · 존중이란 돈이나 지위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,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도 끝까지 사람으로 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.

이 시선을 더 들여다보고 싶다면

불평등 사회의 인간 존중 (Respect in a World of Inequality) · 리처드 세넷 · 2003

잘나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함께 사는 사회에서, 어떻게 서로의 자존을 지켜 줄 수 있는지를 묻는 책입니다.

오늘처럼 누군가의 어려운 형편이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자리에서, '돕거나 처리하는 방식'이 도리어 사람을 깎아내릴 수 있다는 걸 짚어 줍니다.

PPAI Lab · 소개
Cue

함께 한 주를 돌아보는 커플 다이어리. 우리가 안에 쓴 것만, 조용히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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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늘의 질문

오늘 무심코 지나친 어떤 명단이나 안내문 속에, 누군가의 사정을 조용히 헤아릴 자리가 빠져 있진 않았나요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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