마을 행사 날, 새벽 어스름부터 나와서 짐 나르고 의자 놓고 국 끓이고, 정신없이 손을 보탰습니다. 다 끝나고 돌려받은 결산서를 보는데, 어디에도 제가 적힐 칸이 아예 없더라고요. 혹시, 어딘가에서 이런 경험 있으신가요?
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. 결산서엔 빌린 의자도, 사 온 국 재료도, 들어오고 나간 돈도 다 적을 칸이 있었습니다. 그런데 그걸 새벽부터 굴린 '사람'을 적을 칸은 없었어요. 캐나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, 사람은 혼자 힘으로 '나'가 되는 게 아니라 남들이 나를 어떻게 알아봐 주느냐 속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빚어진다고 했습니다. 그렇게 보면 명단의 빈자리는 단순한 행정 누락이 아니라, '이 일에 당신은 없었던 셈 친다'는 조용한 한 문장일지도 모릅니다. 서운함이 유난이 아니었던 거죠. 누굴 미워할 일도 아닙니다 — 그 종이는 숫자를 적도록만 만들어졌지, 사람을 적도록은 애초에 만들어진 적이 없었으니까요.
저도 예전 같으면 '뭐 그런 걸로 서운해하냐'며 그냥 넘겼을 겁니다. 그런데 이렇게 한번 다시 보기 시작하니까, 우리가 무언가를 '정리'하고 '결산'할 때 사람의 자리는 늘 맨 마지막이거나 아예 없다는 게 보이더라고요. 오늘 하루, 무심코 지나친 명단이나 결산이나 보고서 하나를 잠깐 낯설게 다시 봐보세요. 거기 숫자는 다 있는데, 정작 그 일을 해낸 사람만 빠져 있진 않았는지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