이력서를 내밀면, 제 전공이나 그동안 해 온 일을 보기도 전에 '한국말부터 배우고 오세요'라는 말이 먼저 돌아왔어요. 몇 년을 쌓아 온 게 분명히 있는데도, 출발선은 늘 저만치 뒤에 그어져 있었습니다. 가진 걸 보여줄 새도 없이 그냥 발길을 돌려본 적, 한 번쯤 있으셨을까요.
'한국말부터 배우세요'라는 말은, 언뜻 들으면 챙겨 주는 말처럼 다정하게 들립니다. 그런데 그 다정함은 정작 그 사람이 이미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한 번도 묻질 않더라고요. 마사 누스바움은 존엄을 이렇게 봤습니다 — 존엄은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, 가진 것을 실제로 펼칠 자유가 열려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요(역량 접근법). 실력은 이미 그 사람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. 다만 그 실력이 세상으로 나올 문 앞에 누군가 '이것부터'라는 조건 하나를 걸어 두면, 안에 아무리 많은 게 있어도 문이 닫혀 있는 한 없는 것처럼 취급되죠. 그러니 출발선을 뒤로 미는 건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, 그 능력을 받아 줄 자리가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신호일지도 모릅니다.
저도 예전엔 '자격부터 갖춰 오는 게 순서지' 하고 쉽게 고개를 끄덕였어요. 그런데 어떤 조건은 사람을 준비시키는 게 아니라, 그저 문 앞에 오래 세워 두기만 하더라고요. 요즘은 누군가에게 '이것부터'라고 말하려다가, 그 한마디가 상대의 순서를 얼마나 뒤로 미루는 건지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