아이들 스무 해를 키워 이제 겨우 한숨 돌리나 했더니, '그만 놀고 이제 일 좀 알아봐라'라는 말이 돌아왔습니다. 웃으며 흘려보내려 했지만, '놀다'라는 그 말만은 끝내 흘러가지 않았습니다. 삼키고 돌아선 그 저녁, 저만 겪은 일은 아닐 겁니다.
'놀았다'는 그 한마디 앞에서, 매일 반복된 스무 해가 통째로 사라집니다. 밥을 짓고, 아픈 아이 곁에서 밤을 새우고, 크고 작은 살림을 굴린 그 시간이 '아무것도 안 한 시간'으로 다시 이름 붙는 거죠.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, 사람은 홀로 자기가 되는 게 아니라 곁의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비춰 주느냐 속에서 자기가 된다고 봤습니다. 그래서 누군가에게 잘못된 상(像)을 씌우는 일 — 이를테면 하루도 쉰 적 없는 사람을 '놀던 사람'이라 부르는 일 — 은 단순한 실언이 아니라, 그 사람의 지난 시간을 조용히 눌러 앉히는 일이 됩니다. 서운함은 아마 여기서 올 겁니다. 인정받지 못해서가 아니라, 있던 일이 '없던 일'로 고쳐 불린 데서요. 어쩌면 우리 곁엔, 한 일이 '한 일'로 남는 이름은 있어도, 돌본 시간이 '돌본 시간'으로 남는 이름은 아직 마련돼 있지 않은지도 모릅니다.
저도 얼마 전까진,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'요즘 뭐 하고 지내?'를 참 쉽게 물었습니다. 그 가벼운 물음이 듣는 사람에겐 '지금 아무것도 아닌 사람'이라는 확인으로 되돌아올 수도 있겠다고, 이번에야 어렴풋이 짐작해 봅니다. 오늘 누군가의 '요즘'이 궁금해지거든, 그가 무엇을 안 하고 있는지보다 지금껏 무엇을 지어 왔는지가 먼저 떠오르면 좋겠습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