'넌 그냥 머릿수만 채우면 돼. 생각은 윗선에서 하니까.' 회의에서든 현장에서든, 이 말을 매일같이 듣는 자리가 있습니다. 웃으며 하는 말이라 저도 그냥 따라 웃었는데, 돌아서면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헛헛하더라고요.
웃으며 건넨 이 한마디 안에는, 사람을 슬쩍 둘로 쪼개 놓는 이상한 셈법이 하나 들어 있습니다. 몸은 여기 남아 수를 채우고, 판단은 저 위에서 한다는 거죠. 칸트는 사람을 한낱 도구로만 쓰는 일과, 그 자체를 목적으로 대하는 일을 갈라 말했습니다. 여기서 '목적으로 대한다'는 건 대단한 게 아니라, 저 사람에게도 스스로 생각하고 정할 몫이 있다고 여겨 주는 일이고요. 그런데 '생각은 윗선이 한다'는 한마디는, 바로 그 몫을 조용히 걷어 가 버립니다. 그래서 머릿수는 몸으로 채워져도, 생각이 걷힌 자리는 채워질수록 오히려 한 칸씩 비어 갑니다.
솔직히 저도 '생각은 윗선이 하겠거니' 하며 제 몫을 슬며시 내려놓은 날이 많았습니다. 편해서라기보다, 그렇게 채우기만 하는 게 여기서 오래 버티는 방법 같았거든요. 그런데 몸만 채우고 돌아온 저녁이면, 그 헛헛함이 이상하게 그대로 남아 있더라고요. 그 한마디가 덜어 주겠다는 건 정말 무거운 짐일까요, 아니면 제가 스스로 생각할 몫일까요. 편하다는 느낌이 먼저 밀려올 때일수록, 저는 이제 그 자리에서 한 박자만 늦게 이 물음을 떠올려 보려 합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