하찮은 깨달음 · 오늘의 깨달음
비모욕

창구 바닥의 노란 선, 그리고 그 선이 막지 못한 한 문장.

번호표를 들고 창구 앞에 앉습니다. 서류를 내밀자, 뒤에 선 사람들까지 다 들리는 목소리로 물음이 돌아옵니다. '소득이 이게 전부예요?' 그 순간 줄이 조금 조용해집니다.

잠시 조용해진 줄, 그 발밑을 노란 테이프가 가로지릅니다. 다음 사람은 여기서 기다려 달라는, 서류가 서로 보이지 않게 한 걸음 거리를 두라는 표시입니다. 누군가는 저 선을 긋기 위해 회의를 했고, 규정을 만들었고, 바닥에 테이프를 붙였을 겁니다. 리처드 세넷은 불평등한 자리에서도 사람이 깎이지 않게 하는 일을 '존중'이라 불렀는데, 그가 눈여겨본 것은 개인의 선한 마음씨보다 그 마음씨가 없는 날에도 사람을 지켜 주는 절차 쪽이었습니다. 이 창구에는 눈에 대한 규칙이 있습니다 — 한 걸음 물러서세요, 화면을 돌려놓으세요. 그런데 귀에 대한 규칙은 아직 아무 데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. 소득이 얼마인지, 왜 도움이 필요한지가 몇 사람에게까지 들리는가는 그날 창구의 목소리 크기에 맡겨져 있고, 그렇다면 그 자리엔 사람을 지켜 줄 몫 하나가 제도 쪽에 비어 있는 셈입니다.

눈을 가리는 장치는 진작 마련됐고, 귀를 가리는 장치는 아직입니다. 그 사이로 새어 나온 건 한 사람의 사정이었지만, 새어 나오게 둔 건 아무도 맡지 않은 빈자리였습니다. 귀에 들어와 버린 남의 사정 하나쯤은 누구의 기억에나 남아 있습니다. 그 소리를 새어 나오게 한 것은 누군가의 목소리였을까요, 아니면 아직 아무의 몫으로도 적히지 않은 그 빈칸이었을까요.

오늘의 시선 — 리처드 세넷(Richard Sennett): 존중 — 불평등한 자리에서도 사람을 깎아내리지 않는 법 · 존중은 따뜻한 마음씨가 아니라, 도움을 주고받는 자리에서 사람이 깎이지 않도록 미리 짜여 있는 절차와 태도에 가깝다는 뜻입니다.

이 시선을 더 들여다보고 싶다면

불평등 사회의 인간 존중 (Respect in a World of Inequality) · 리처드 세넷 · 2003

도움을 주고받는 자리에서 그 도움이 어떻게 사람을 깎아내리기도 하는지를, 복지 제도와 자신의 성장 배경을 함께 들여다보며 살핀 책입니다.

오늘 창구 장면처럼, 존중이 개인의 마음씨가 아니라 제도와 절차의 문제라는 걸 보여 줍니다.

PPAI Lab · 소개
FocusBuddy

공부할 땐, 공부만. 시작 버튼 한 번이면 알림은 끝난 뒤 한 번에 — 학습 집중 앱.

자세히 보기 →
오늘의 질문

오늘 내가 서 있던 줄에서, 앞사람의 사정은 어디까지 들렸을까요?

🎬 영상으로 보기📝 블로그에서 풀버전 읽기

내 책갈피 보기 →

출처